
10년 넘게 테슬라의 핵심 배터리 공급사로 일해 온 회사가 있다. 파나소닉 에너지다. 네바다 기가팩토리 협력 생산과 일본 와카야마 공장을 통해 테슬라에 원통형 셀을 공급해 왔다. 그런 파나소닉 에너지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역전을 앞두고 있다고, 닛케이 아시아가 9월 19일 보도했다.
이번 회계연도 데이터센터용 배터리 매출이 전기차용 배터리 매출을 처음으로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다. 파나소닉 에너지의 자체 전망치는 데이터센터 배터리 매출 약 5,500억 엔(약 4조 8,700억 원), 전기차 배터리 매출 약 5,440억 엔이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회사의 명성을 쌓아 올린 사업이 신생 사업에 매출 규모로 밀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역전의 원인은 테슬라 쪽 수요가 줄어서가 아니다. 다른 곳에서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AI 학습·추론을 처리하는 데이터센터가 일반 서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력을 끌어 쓰기 시작했고, 빅테크들은 몇 년 치 배터리 백업 물량을 미리 확보하려고 경쟁하고 있다. 수십 년간 원통형 셀을 만들어 온 파나소닉은 새로 개척할 필요 없이 이미 준비된 기술로 두 번째 거대 고객군을 얻은 셈이다.
테슬라 입장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파나소닉은 데이터센터용으로 다른 공장의 라인을 돌리면서도, 테슬라 전기차 셀을 담당하는 네바다·와카야마 공장만큼은 그대로 자동차용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 구분은 이 글 뒤에서 다시 짚는다.
AI 서버랙마다 배터리가 따로 필요한 이유
일반 서버는 전력을 비교적 일정하게 쓴다. AI 학습·추론용 하드웨어는 다르다. GPU가 대기하다가 연산 묶음이 들어오는 순간 수십분의 1초 만에 거의 최대 부하로 치솟고, 다시 대기 상태로 돌아간다. 파나소닉은 이 현상을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순간 최대 전력이 급격히 치솟고, 전압이 불안정해지면서 데이터센터 전력 시스템에 실제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빅테크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는 해법은 시설 전체를 감당하는 중앙집중형 무정전전원장치(UPS)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서버랙 하나하나에 배터리 백업 장치를 직접 붙여, 전압 불안정이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흡수하도록 만든다.
파나소닉의 랙 단위 배터리 팩에는 백업 기능 못지않게 중요한 두 번째 기능이 있다. 이른바 피크 셰이빙이다. 전력 수요가 낮은 시간대에 전기를 저장해 뒀다가 수요가 몰리는 순간 방출해, 시설이 가장 위태로운 시점에 전력망에서 끌어와야 하는 전력량을 줄여 준다. AI의 전력 수요가 커질수록 전력회사와 규제 당국이 눈여겨보는 기능이다.
이 두 기능의 조합 덕분에 파나소닉은 빠르게 커지는 이 틈새시장에서 압도적 1위 공급사가 됐다. 회사 스스로 밝힌 점유율은 데이터센터 분산 전원 공급 시장의 약 80%로, 2025년 말 기준 시너지 리서치 자료를 근거로 든다. 대만 델타 일렉트로닉스 등의 추격을 따돌린 수치다.
수요가 공급을 얼마나 앞질렀는지는 올해 초 파나소닉이 직접 공개한 숫자로 드러난다. 빅테크 고객들이 이미 2029 회계연도까지 계획된 생산 물량의 80% 이상을 선점 계약으로 묶어 뒀다는 것이다. 최대 클라우드 사업자가 아닌 일반 기업·코로케이션 고객은 갈수록 줄어드는 나머지 물량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전기차에서 서버랙으로, 공장을 재배치하는 방식

파나소닉의 전 세계 공장 배치를 보면 이 전환을 얼마나 신중하게 관리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테슬라와의 협력으로 지어진 네바다 기가팩토리와 일본 와카야마 공장은 여전히 전기차 셀에 집중한다. 테슬라가 가장 직접 의존하는 라인이고, 파나소닉은 이 라인을 자동차 고객 쪽에 그대로 묶어 뒀다.
변화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사카 공장은 이미 전기차용과 데이터센터용 배터리를 나란히 병행 생산하고 있다. 시코쿠섬의 도쿠시마 공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 생산 라인을 데이터센터 전용으로 전환했다. 미국 캔자스의 신설 공장은 2028 회계연도부터 데이터센터용 배터리를 생산할 예정이며, 기존 자동차용 리튬이온 라인 일부도 2027 회계연도부터 전환에 들어간다.
이 흐름을 타는 일본 기업은 파나소닉만이 아니다. 히타치 에너지는 미시시피에 5억 2,800만 달러를 들여 대형 변압기 신공장을 짓기로 했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동시에 늘면서 고압 변압기 품귀 현상이 2030년대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내린 결정이다. 데이터센터 액체냉각용 정밀 밸브·펌프 하우징을 공급하는 공작기계 업체 오쿠마는 8월 국내 수주액이 전년 동기 대비 65% 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슈나이더 일렉트릭은 변전소 연계부터 변압기, 스위치기어, UPS, 인라인 액체냉각까지 전력·냉각 인프라 전체를 묶은 턴키 패키지를 일본 시장에 더 적극적으로 들이밀고 있다. 스미토모 전기공업은 아예 다른 배터리 화학을 들고 초대형 고객을 노린다. 수계 전해액을 써서 화재 위험이 없고, 통상 10년 만에 성능이 떨어지는 리튬이온 배터리와 달리 최대 30년까지 성능 저하 없이 쓸 수 있는 바나듐 레독스 흐름 배터리다.
스위스 자산운용사 롬바드 오디에의 존 우즈 아시아 최고투자책임자는 이 흐름을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 산업 부문이 글로벌 AI 인프라 확장을 떠받치는 핵심 곡괭이·삽 공급자로 자리 잡았고, 그 지출의 직접적 수혜를 누리는 아시아 하드웨어 공급망 기업들이 막대한 부채로 데이터센터를 짓는 미국 빅테크보다 투자 매력도가 높다는 것이다.
닛케이가 데이터센터 운영사 26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는 이 흐름의 규모를 숫자로 보여준다. 일본의 AI 데이터센터 수용 용량이 앞으로 8년간 네 배로 늘어,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위 데이터센터 투자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됐다.
테슬라가 단일 공급사 의존을 줄여 온 전례는 이 대목에서 참고할 만하다 — 희토류 자석 없이 만든 사이버캡 구동계 사례 역시, 집중된 공급망을 기술로 우회한 비슷한 선례다.
이 역전이 테슬라에 증명하는 것과 증명하지 못하는 것
파나소닉이 실제로 공개한 내용을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5,500억 엔과 5,440억 엔은 아직 마감되지 않은 회계연도의 전망치이지 확정된 결산 수치가 아니다. 파나소닉의 회계연도는 4월에 시작해 이듬해 3월에 끝나므로, 최종 집계까지는 몇 달치 전기차·데이터센터 매출이 더 쌓여야 한다.
이 역전은 순전히 AI가 자동차용 배터리 생산 여력을 빼앗아 간 이야기만도 아니다. 전 세계 전기차 수요 증가세가 예상보다 둔화한 이른바 ‘EV 캐즘’ 현상이 배터리 업계 전반에 사업 다각화 압박을 주고 있다는, 더 넓은 산업 흐름의 반영이기도 하다. 파나소닉의 데이터센터 전환은 AI 특수를 좇는 움직임인 동시에, 이런 수요 둔화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테슬라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다중 공급사 전략이 애초에 대비해 둔 시나리오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테슬라는 기가텍사스와 기가베를린에 자체 4680 셀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데 수년을 투자했다. 어느 한 외부 공급사의 생산 여력 결정에 차량 생산이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LG에너지솔루션·CATL과의 별도 계약도 병행한다. 한 공급사가 테슬라 전용이 아닌 생산 여력을 다른 곳에 재배분하는 정도는, 이 전략이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해 둔 다각화 리스크에 해당한다.
파나소닉이 이 전환을 아무 라인이나 무차별로 돌리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의 구분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오사카가 라인을 나누고 도쿠시마가 전면 전환하는 와중에도, 테슬라가 가장 직접 의존하는 네바다와 와카야마는 그대로 전기차 셀 생산에 묶여 있다. 우연히 남은 여력이 아니라 의도된 선택이라는 뜻이다.
업계 관찰자들이 짚는 더 장기적인 질문은 테슬라보다는 데이터센터 시장 전체를 향한다. 빅테크가 이미 2029 회계연도까지 파나소닉 계획 생산량의 80% 이상을 선점한 상태에서, 그 상위 그룹에 들지 못하는 일반 기업·코로케이션 사업자들이 실질적인 공급 부족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다. 이는 배터리 백업 업계 전반의 가격과 납기에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참고 자료
닛케이 아시아, Panasonic Energy gets in on AI demand boom, 2026년 9월 19일
글로벌이코노믹, 테슬라 제치고 데이터센터가 효자, 파나소닉 AI 백업 배터리 매출 EV 역전, 2026년 9월 20일
Network World, Panasonic says data center batteries are selling out and AI is to blame, 2026년 3월 26일
Panasonic Newsroom Global, Empowering AI Stability at Scale: Energy Storage Systems for Data Centers


